향엔 성별이 없다, 기억만 있을 뿐.
향수를 남자용, 여자용으로 나누는 건 누가 정한 걸까요? 감정과 취향, 그리고 나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서의 향. 이 글에서는 젠더리스 향수가 말하는 새로운 향 문화와 그 자유로움을 이야기합니다.
향수에 붙은 성별은 언제부터였을까?
향수는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종교, 치유, 미용, 사교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 왔다.
특히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자를 기리거나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데에도 향이 사용되었고, 중세 유럽에서는 질병 예방 수단으로 향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런 사용은 인간의 삶 속에서 향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남자 향수’, ‘여자 향수’라는 구분은 놀랍게도 향 자체보다는 ‘시장 전략’에서 비롯되었다.
본격적인 성별 마케팅은 20세기 중반 미국 광고 산업의 발달과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 사회는 성 역할에 대한 기대가 뚜렷했기 때문에, 광고주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남성은 직장에, 여성은 가정에’라는 구도가 반영된 향수 광고는 소비자에게 익숙하고 쉽게 소비되는 분류 체계를 제공했고, 브랜드는 성별에 따라 향조, 색상, 병 디자인을 나눴다.
예를 들어, 남성 향수는 주로 나무, 가죽, 머스크 향조와 짙은 병 색깔을 사용했고, 여성 향수는 자몽, 장미, 바닐라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향과 투명하거나 파스텔톤의 병을 사용했다.
이러한 구분은 향수를 소비하는 대중에게 '성별 코드'로 작용했다.
어떤 향을 고를 때 그 향이 내 취향보다 '내 성별에 어울리는가?'라는 기준이 앞서게 되었고, 이것이 반복되며 하나의 규범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어디까지나 '문화적 구성물'일 뿐, 생물학적 혹은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후각은 성별보다 감정, 기억, 선호와 훨씬 더 깊이 연결되어 있다.
즉, 우리가 향을 고를 때 정말로 따라야 할 것은 ‘성별’이 아니라, ‘감각’과 ‘경험’이다.
향은 성별보다 감정을 먼저 기억한다
어떤 냄새가 그리운 이유는, 그 냄새가 기억보다 먼저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도 밝혀졌듯이, 후각은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가장 원초적인 부위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향기를 통해 사랑을 떠올리고, 어떤 장소의 냄새로 아늑했던 유년을 떠올린다.
향은 단순한 냄새가 아닌, 감정의 도화선이다.
특정 향을 맡으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비 오는 날의 흙냄새, 엄마 화장대의 파우더 향, 첫 데이트에서 상대가 뿌렸던 오리엔탈 향수.
이런 순간들을 되살려주는 것이 향이 지닌 힘이다.
이 힘은 전혀 성별과는 무관하며, 오직 감정의 지층과 맞닿아 있다.
남성용이라 분류된 우디 계열이 여성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고, 여성용이라 불린 플로럴 향이 남성에게 따뜻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유다.
젠더리스 향수는 이러한 감정 중심의 선택을 권장한다.
어떤 향이 나를 더 편안하게 만드는지, 어떤 향이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떠올리게 하는지를 스스로 묻고 그에 따라 선택하게 한다.
브랜드들도 감성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루이비통의 ‘Imagination’은 이름 그대로 ‘상상의 공간’을 주제로 한 향수로, 남성/여성 구분 없이 창조적인 순간을 향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또, 바이레도의 ‘Gypsy Water’는 떠돌이 예술가의 자유로운 삶을 표현한 향수로, 성별보다는 정서적 무드에 집중한다.
이처럼 향은 본래부터 감정적 언어였고, 젠더리스 향수는 그 언어를 더욱 진실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창구다.
‘어울림’이라는 기준이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돌아올 때, 우리는 비로소 향수와 감정의 진짜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젠더리스 향수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향 문화
젠더리스 향수는 단지 새로운 ‘트렌드’가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하려는 문화적 실천이다.
패션, 뷰티, 뮤직 씬에서도 ‘경계를 허무는 움직임’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남성이 스커트를 입고, 여성이 슈트를 입는 시대.
향도 더 이상 성별을 제한하는 도구가 아니라, 나의 분위기, 나의 취향, 나의 서사를 표현하는 하나의 선택지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Z세대를 중심으로 한 소비자층은 ‘제품의 가치’보다 ‘가치 있는 메시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어떤 브랜드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그것이 자신의 가치관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살핀다.
이들은 향수를 고를 때 ‘멋있다’, ‘예쁘다’ 보다는 ‘내가 되고 싶은 나를 표현하는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젠더리스 향수는 이런 흐름에 완벽히 부합한다.
브랜드 차원에서도 젠더리스는 단순한 마케팅 포인트를 넘어 정체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조 말론 런던은 대부분의 향수를 유니섹스로 설계하며, 레이어링을 통해 나만의 향을 조합할 수 있게 한다.
딥티크(Diptyque)는 제품 설명에 성별 언급 없이, 향이 연상시키는 풍경이나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심지어 일부 브랜드는 향수병 디자인도 심플하고 모던하게 만들어, 외형적으로도 성별 구분을 지우려는 시도를 한다.
젠더리스 향수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원하는 향은 어떤 이미지인가요?”가 아니라 “당신은 어떤 순간에 이 향을 기억하고 싶은가요?”라고.
그리고 이 질문은 단지 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기 정체성을 외부가 아니라 내 안에서 발견하려는 시도, 그것이 바로 이 새로운 향 문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진짜 메시지다.